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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옥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by notion2536 2025. 3. 18.

책 작은 땅의 야수들 표지

 

<작은 땅의 야수들> 옥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라고 딱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작과 끝이 옥희로 끝나기 때문에 저는 옥희가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917년, 어린 옥희는 엄마 손에 이끌려 기생집으로 갑니다. 평양에서 유명한 기방에서 빨래를 할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서입니다. 그러나 옥희네가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은 구해 빈자리는 없었고, 기방의 주인 은실은 옥희 엄마에게 옥희를 아기 기생으로 보내는 건 어떠하냐 제안합니다. 엄마는 거절하지만, 옥희는 이대로 집에 가면 의원집 모자란 아들과 팔려가듯 결혼하나, 기생이 되나 똑같다고 생각하여 기생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옥희의 기방 생활이 시작됩니다. 평양에서 지내던 중, 은실의 딸인 월향에게 불행한 일이 닥칩니다. 그래서 은실은 딸인 월향과 연희, 옥희를 경성에 있는 사촌이 하는 기방으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옥희는 자신이 춤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기방에서 일하다가 극단에서 일하며 배우로서 승승장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력거를 끌던 한철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920~1930년데 배우로 부유한 시절을 보내며 옥희는 그 돈으로 한철을 뒷바라지합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집중하며 조선 내에서 각종 물자를 수탈해 가고, 1940년대 들어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며 옥희의 삶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집니다. 옥희는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이 된 후에도 복잡한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제주도로 들어가 옆집 아기를 키우며 살아갑니다. 명백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옥희의 삶은 그 시대에서 유리된 느낌입니다. 옥희는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본의 앞잡이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옥희의 주변 인물들이 그런 인물들이 많고, 옥희는 그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 같기도 합니다. 옥희가 기생인 만큼, 기생들의 삶이 많이 드러납니다. 기생일을 하며 번 돈을 모아 독립자금에 보태는 사람들, 3.1 만세 운동에 손을 부여잡고 앞장서 나서는 기생들의 모습을 조명한 점은 인상 깊었습니다.

 

정호의 이야기

정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평양으로 온 소년입니다. 체격이 다부지고 싸움을 잘해 오자마자 거지 소년들 사이에서 대장을 차지합니다. 어느 날 정호는 아기 기생으로 길거리에 나와 꽃을 뿌리는 옥희를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옥희가 아무렇게나 뿌리는 꽃을 가지고 일부러 자신을 향하도록 뿌렸다고 착각해서, 옥희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호는 청년이 되어서도 옥희를 좋아합니다. 구걸이나 하던 거지 소년은, 어른이 되어 자신의 구역을 만들고 수금을 하는 깡패가 됩니다. 그러나 옥희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같은 거지 무리인 미꾸라지의 소개로 이명보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이명보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3.1 만세운동까지만 해도 비폭력주의자였으나, 만세운동을 계기로 비폭력 운동의 허망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군자금을 모아 무력 투쟁, 암살 등을 주도해 나가는 인물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정호는 점점 이명보 선생의 가르침에 감화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는 30년대 후반 만주로 가서 일본 부총독의 암살에 성공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몸을 숨깁니다. 이때 정호에게 도움이 된 인물이 일본인 야마다입니다. 야마다는 정호의 아버지가 자신을 구해준 것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어, '이 편지를 지닌 자는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니 만주로 차 줄 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주며 숨어있으라고 합니다. 편지를 가지고 숨어있던 정호는 독립을 맞이하고 경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독립 후 진영의 다툼 속에 이명보 선생이 죽임을 당하고, 정호 또한 사회주의자이자 일제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갑니다. 정호가 처음부터 끝까지 호감인 인물은 아닙니다. 옥희에게 하는 행동은 자기감정에 취해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깡패 활동도, 딸 뻘의 아이를 부인으로 맞아드린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찌 됐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 누명으로 몰락하는 것 자체가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은 씁쓸함을 줍니다.

 

한철의 이야기

한철은 안동 김 씨 후손이자 위로는 2명의 누나가 있는 장손입니다. 어머니는 한철에게 네가 가문을 일으킬 인물이라고 오냐오냐 함과 동시에 부담을 주고, 누나들에겐 장손을 잘 모시라며 윽박지릅니다. 한철은 인력거 생활을 하며 야학에 다니며 근근이 살아갑니다. 자신의 인력거를 타는 옥희를 좋아하게 되어 옥희에게 고백하고, 옥희도 그 마음을 받아들여줍니다. 그리고 옥희의 제안으로 인력거꾼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옥희는 한철이 공부만 할 수 있도록 학비는 물론 한철의 집의 생활비까지 부담해 줍니다. 그 결실로 마침내 한철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한철이 대학에 입학한 후의 소감이 참 기가 막힌데, '이 모든 일을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냈기 때문에 뿌듯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철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취직이 잘 안 되어, 성수의 자전거포에서 일하게 됩니다. 옥희는 한철과 결혼하고 싶지만, 한철은 옥희의 그 뒷바라지를 다 받아 놓고서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기생이랑 결혼하여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옥희를 버리고 성수의 딸과 결혼합니다. 성수는 집안 대대로 부자이며 성수의 부친은 적극적인 친일 반민족행위자입니다. 한철은 그런 성수의 도움으로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며, 독립 후에는 자동차 회사를 만들고 성공시킵니다. 한철의 장인인 성수의 반민특위 재판이 인상적입니다. 성수는 살아가는 내내 일본의 부역자였지만, 딱 한 번, 자신이 좋아하는 기생 앞에서 센 척하느라 3.1 만세운동 인쇄물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한 번의 일을 가지고 성수는 자신이 독립을 물밑에서 도왔다고 변호하며 풀려납니다. 이명보 선생과 정호의 재판과 대비되는 모습이 씁쓸할 따름입니다. 이런 개개인의 모습이 정말 역사를 그대로 반영한 것 같습니다.

한철의 '이 모든 일은 나 스스로 했다'라는 생각은 자동차 회사의 사장으로 성공한 뒤에도 다름없습니다. 그가 온전히 배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옥희의 덕분이었고, 그가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반민족행위자인 장인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한철이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이 모든 것은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인터뷰하는 모습도 역시나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의 여정을 그리지도 않고, 선이 행복해지고 악이 몰락하는 그런 권선징악의 결말도 아닙니다. 그저 일제강점기 시절, 그리고 광복 이후 우리 역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책을 보면 너무 사실적이어서 답답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