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자
죽음이 없는 세계는 과연 유토피아일까요? 2042년, 슈퍼컴퓨터가 진화하여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게 되면서, 지구는 그 어떤 문제도 없는 완벽한 세계가 됩니다. 슈퍼컴퓨터 "선더헤드"는 죽은 사람을 소생시키기도 하고 전쟁을 막기도 합니다. 이 선더헤드가 관여하지 않는 유일한 영역이 바로 "사람의 목숨을 끝내는" 일입니다. 세계에서 죽음은 사라졌지만 생명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지구는 그 모든 인간이 살기엔 너무 비좁습니다. 지구 밖 행성을 개척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인류는 인구 조절을 위해 목숨을 거두는 일을 맡은 "수확자"라는 존재를 탄생시킵니다.
시트라와 로언은 평범한 열여섯 살의 학생입니다. 수확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수확자 패러데이의 눈에 들어 수확자 수습생이 되고 살인 기술을 익힙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받아들이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시트라와 로언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그들에게 스승인 패러데이는 수확이 성직자의 봉사와도 같은 성스러운 임무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살인을 하면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자신이 거두는 생명에 연민을 가지며, 이것이 올바른 수확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편견도 악의도 없이, 자연 같은 손길로 사람을 거두어야 하며, 혹여나 탐하게 될지 모를 권력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가족을 만들어선 안 되고 모범적인 언행을 보이며 아무것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인간이 살아있는 사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살인을 해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수확자 수습생에서 탈락하고야 말겠다던 시트라와 로언은, 스승 패러데이의 이런 가르침을 받으며 수확자의 임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선더헤드
2편 <선더헤드>는 인류의 충실한 하인인 슈퍼컴퓨터와,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미래를 망치는 인간의 모습을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대부분 SF 소설이나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리는 것과 달리, 인간 세계를 통제하는 "선더헤드"는 악하지도 않고 인류를 지배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선더헤드는 인류의 충실한 하인이자 친구이고, 부모이며 사회 안전망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인간 스스로의 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불안합니다. 패러데이처럼 선한 이들도 존재하고,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인류를 망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수확자 "고더드"입니다. 고더드는 수확을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더드는 수확이라는 핑계로 잔인한 살인 행위를 일삼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공포를 얻으며, 이 공포를 통해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이에 감화된 많은 수확자들이 "신질서"라는 세력을 만듭니다. 선더헤드는 수확자들에게 간섭할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한편, 이런 '신질서' 수확자들에게 반기를 든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루시퍼입니다. 루시퍼는 정식으로 선택받은 수확자는 아니지만, 편법을 사용해 수확자로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루시퍼는 연민으로 수확을 하지 않고, 쾌락을 좇아 함부로 살인을 저지르는 수확자, 또는 수확을 빌미로 협박을 해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수확자, 개인적인 이유로 수확 대상을 결정하는 자격 미달 수확자를 살해합니다. 이런 루시퍼의 행동이 파멸로 나아가는 인류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종소리
3편 <종소리>에서 상황은 더 암울해집니다. 고더드를 위시한 신질서 수확자들의 모략 때문에 상황은 점점 더 암울해집니다. 선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칠 것 없이 악한 짓을 저지르는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어째서 선행은 작고 사소할 수밖에 없고, 악행은 강력하고 치명적일까요? 죽음이 없는 유토피아는 점점 파멸로 나아갑니다.
인류를 위해 헌신하던 선더헤드는 <종소리>에서 인류와 모든 소통을 끊어버립니다. 이는 2편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선더헤드는 이에 절망하의 온 세상에 경보기와 알림 사이렌, 경적을 울립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선더헤드로부터 '불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불미자란 잘못을 저질러 선더헤드와 직접 소통하며 그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 불미자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그 참혹한 사건에 모든 인간이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힘 있는 악인을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굽실대며 권력을 쥐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더헤드를 잃고 잘못을 돌이켜보기는커녕, 선더헤드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모든 것을 대신해 줄 것이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사라진 듯한 이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전면에 나서서 목소리를 싸우는 시트라, 방법론적인 의문이 있지만 자신이 나름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루시퍼,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남을 돕는 그레이슨 같은 사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앞서 싸우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타인을 위하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힘 덕분에 파멸로 향하던 세계는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
리뷰
이 책도 정말 재밌습니다. 개인적으로 프로젝트 헤일메리 이후 손을 못 떼고 읽은 책입니다. 1편 수확자의 초반부가 조금 지루하긴 합니다. 방대한 세계관과 수확자의 임무, 고뇌 이런 것들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1편 후반부부터 2편, 3편은 조금의 지루한 틈도 없이 흥미롭고 재밌었습니다. 주인공들이 늘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서지고 깨어지고 잘못된 선택을 하며 성장해 나가는 모습도 인상 깊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생사를 판단한다는 것은 참으로 오만한 일입니다. 결국 인간은 선더헤드와 달리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책을 읽으면 처음엔 고더드 혼자 악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고더드의 숨겨진 동조자들과 대수확자들이 죽고 난 후의 전향자들을 생각하면 고더드 혼자 악인인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언제나 반드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이 그랬듯,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만한 독재자는 신민들에게 세상의 죄악을 가장 자기 방어 능력이 없는 이들 탓으로 돌리도록 허용한다. 도도한 여왕은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학살을 허용한다. 오만한 대통령은 자기 야심에만 득이 된다면 온갖 증오와 혐오를 다 허용한다. 그리고 불편한 진실은, 사람들이 거기 탐닉한다는 사실이다. 사회는 스스로를 먹어 치우고 썩어 간다. 허용은 자유의 부풀어 오른 시체다. -선더헤드